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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청첩장 앞에만 서면 나는 왜 작아지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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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11-05-02 09:29 댓글 2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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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5, 10. 청첩장이나 부고장을 받으면 맨 처음 떠오르는 숫자들이다. 그 다음, 축하 혹은 애도를 앞질러 이번 달 수입지출 명세가 눈앞에 삼삼해진다. 한꺼번에 서너 장이 겹쳐오거나, 발송인이 얼굴만 아는 정도일 경우에는 대입 수학문제만큼이나 머릿속이 복잡해진다. 집안 경조사 방명록을 들쳐보며 받은 만큼만 봉투에 담으려니 그 사이 물가 상승률이 마음에 걸리고, 얼굴만 아는 정도는 나 혼자 생각이고 그 쪽에선 나를 친근히 여기는 게 아닐까 염려가 된다. 얼마 전에 애경사 치른 지인을 만나면, 지은 죄 없이 민망할 때가 쌔고 쌨다. 마치, 당신은 내게 얼마짜리 인간이라고 면전에서 쏘아붙이기라도 했던 것처럼.

장관을 역임했던 모모한 인사가 몇년 전에 동남아 어느 곳으로 이민을 갔는데, 주된 이유가 부조금이라는 게 주변의 정설이다. 그 자리까지 올랐으니 지근거리 사람이 보통 사람 몇 갑절일 터인데, 청렴했던 건지 무능했던 건지는 모르겠지만 아파트 한 채가 전 재산에다가 연금 말고는 들어오는 돈이 없어 도저히 버틸 수가 없었더란다. 매달 피치 못해 갖다 바치던 액수만으로, 매일 세 끼니를 가정부가 챙기고 하루건너 골프 치는 생활을 하고 있다 하니 하루아침에 팔자가 폈다고 해야 할까. 일국의 장관 씩이나 해드셨던 양반이 참 얍삽하게도 처신하네 싶으면서도 조금 부럽다. 부조금만 안 나가면 필자나 독자나 최소한 한 단계 윗등급의 차를 굴려도 좋을 입장이니 말이다.

좀 지난 얘기지만, 모친상 조의금으로 1억 7천만원을 받은 관료가 국회 인사청문회 도마에 오른 적이 있다. 야비하게 따져보자면, 비슷한 애경사 몇번 더 치르면 이건 뭐 퇴직금 한푼 없어도 하나도 서운하지 않을 지경이다. 어디 그 관료뿐일까. 정부기관이고 민간기업이고 하다못해 폭력조직의 힘 좀 쓴다 하는 자리를 꿰차고 앉은 면면들에게는 당연지사일 터, 오죽하면 외국 언론에서는 한국의 부조 문화를 공인된 뇌물 통로쯤으로 해석하고 있을까. 하긴, 속으론 꼴같잖은 작자라 접어두고서도 눈밖에 벗어날까 꺼림칙해 웃는 낯으로 들이민 부조금 봉투만 모았어도 일가족 9박 10일 해외여행쯤은 너끈했을 게 솔직한 우리네 셈평이 아닌가.

혼삿날이 말 그대로 동네잔치였던 시절은 사라졌다. 형편껏, 계란꾸러미를 챙겨들거나 씨암탉을 싸들거나 참기름 한병 짜내 부조하던 정성도 사라졌다. 온 동네 사람에게 기름진 음식을 대접하는 일을 잔치의 제일 앞전에 두던 후덕한 인심도 사라졌다. 밤을 새워 고인의 생전을 회상하고, 피붙이와 다름없이 함께 눈물짓던 마음씨도 사라졌다. 바빠서 몸이 올 수 없으면, 남의 손 빌릴 것 없이 간편하게 돈만 보내라고 계좌번호를 알려주거나 모바일 서비스를 제공하는 시절이 무르익고 있다. 혼삿날 손님대접은 요식업소 차지가 되었고, 결혼식은 구경도 안하고 밥만 먹고 오는 게 하객의 요령이 되었다. 먹을 거 없기로는 고속도로 휴게소 뺨치는 게 호텔 뷔페식 피로연임을 다 알면서도 호텔 결혼식은 늘어만 간다. 죽은 사람은 죽은 사람이고, 산 사람이 상전이라 상갓집에서 소리 내어 웃어도 별 허물이 되지 않은 지 오래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정은 갈수록 흐릿해지고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만 점점 더 명료해져갈 뿐이다.

어디서부터 잘못 되었을까. 어쩌다 축의금과 조의금이 세금보다 무섭고 아까운 대상이 되었을까. 어쩌다 부조금이 수입의 10분의 1을 오르내리게 되었을까. 어쩌다, 부줏돈 무서워 바깥출입 끊었다는 은퇴선배가 하나 둘이 아닌 세태가 되었을까. 어쩌다 정성은 사라지고 체면만 남았을까. 어쩌다 알토란같은 내 돈이 남의 체면 차리는 일에 물색없이 쓰이게 되었을까. 어쩌다, 내 휴대전화에는 자녀 결혼시키고 부모님 장례 치를 기백명의 이름이 저장되어 있을까. 어쩌다, 계절의 여왕이라는 5월 서두에 이렇듯 쫀쫀한 소리를 늘어놓게 되었을까. 어쩌다, 우리네 허례허식과 부조금의 모순을 짚어보려던 글이 이렇듯 우왕좌왕 횡설수설 중언부언 지리멸렬해졌을까. 어쩌다 부조금 문제는 누구나 골머리를 앓지만 누구도 풀 수 없는 난공불락의 존재가 되었을까.

양평의 청춘남녀들이여, 내 형편이 좀 펼 때까지는 제발 연애만 해주오.
양평의 어르신들이여, 제 형편이 활짝 펼 때까지는 제발 무병무탈 장수하소서.

안병욱 (ypnnews@naver.com)

댓글목록

올소이다님의 댓글

올소이다 작성일

백번지당한 말씀
상부상조의미풍양속이 뇌물공여의 방책이 돼선안된다
그누군지 높은직에 있던사람은 받기만하고 주는부조는 안한다던데 그게 망할사람

법면님의 댓글

법면 작성일

15년을 기다려야 울아들 장가가는데,,,,
ㅎ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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